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앤 불린 (문단 편집) === 헨리 8세와의 만남과 잉글랜드 왕비 === [youtube(7TA-D9FNlj4)] 드라마의 영향으로 세간에는 '유부남이었던 [[헨리 8세]]를 사로잡아 평민에서 왕비 자리까지 얻어낸 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앤의 외삼촌은 방계 왕족 가문들을 제외하면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내 유일한 非 왕족 출신 공작 가문인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에 불린 가문도 [[젠트리]]라서 일반 평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헨리 7세]]가 보즈워스 전투를 치르고 난 뒤, 귀족 가문은 고작 29개만이 남았으며 튜더 왕조 말기에도 남작 가문을 합쳐도 50여 개에 불과했다. 불린 가문은 [[젠트리]]였는데, 잉글랜드의 귀족 제도 특성상 불린 가도 평민이라기보단 양반처럼 사회 지도층에 해당한다. 그리고 [[시녀]]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유럽]]에서 궁중 시녀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앤 불린은 신분 때문에 살아있을 적에도 죽은 후에도 비난에 시달렸다. 조선 왕조 같은 경우 국외혼이 없기 때문에 "왕의 배우자([[왕비]])가 명문 [[양반]] 사대부 집안 출신이기만 하면 자격이 있지만, 유럽 문화권에서는 남녀 불문 "군주는 기본적으로 통치 가문 출신과 결혼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 밑의 귀족들도 신분에 맞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면 자신과 후손의 신분이 격하 되기 때문에 아무리 잉글랜드의 젠트리는 다른 유럽 국가의 귀족과 비슷한 사회적 입지를 차지한 지위이긴 해도, 유럽 기준에서 보면 왕이 신하인 귀족 가문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한 일로 여겨졌다는 것. 그나마 잉글랜드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귀천상혼]]에 많이 관대한 편이라 가능했던 일이긴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 극적인 신분상승의 예로 받아들여질 만한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울프 홀]]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은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 시집 온 [[공주]]님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국내의 사회지도층 가문의 딸은 이 기준으로는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다고 여겨졌다는 것. 더구나 이전의 왕비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아예 [[이사벨 1세|엄]][[페르난도 2세|빠]]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국왕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교가 됐을 것이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을 시도한 건 캐서린이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하던 1520년대 초반부터였다. 당시 유럽의 왕들은 적법한 결혼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면 후계 자리는 친척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흔해서 후계자를 낳지 못한 본처를 [[수녀원]]으로 쫓아내거나 [[교황청]]에 로비를 해서 혼인무효를 얻어내는 식으로 새 장가를 갔는데 이는 [[헨리 8세]]도 예외는 아니었다. 캐서린과 결혼 생활 중에도 헨리 8세는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왕에게 아부하여 권력을 노리던 야심가들이 아내나 딸들을 상납해서 그 중 대표적으로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헨리 피츠로이라는 [[사생아]]도 낳았다.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도 정부로 삼을 목적으로 접근했으나 앤 불린은 더한 욕심이 있었다. 1520년대 중후반에 [[헨리 8세]]는 젊고 재치있는 데다 매력적인 앤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헨리 8세는 앤에게 정부(情婦)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앤은 왕의 사랑을 받은 당대의 여느 귀족 여인들과 달리 왕을 거부하고,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애정을 부채질해 애태운다. [[프랑스 왕국|프랑스]]에는 공식 정부인 '[[로얄 미스트리스|메트레 상티트르]]'라는 지위가 있었는데,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궁정에서 전례가 없는 지위를 앤에게 약속했으나 앤은 거절하고 결혼을 원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유럽에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가 확고히 규정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동양처럼 정식으로 혼인 관계가 인정되는 [[첩]]을 둘 수 없었다. 물론 정실부인/[[왕비]] 이외의 다른 여성과 관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나 그들은 단지 애인, 내연녀, 정부(情婦)에 불과했고, 정부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면 귀부인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국왕의 정부는 특별히 [[로얄 미스트리스]]라고 칭하며 프랑스의 경우 여러 명의 로얄 미스트리스 가운데 단 한 명에게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en-titre)'라는 특수한 지위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후궁]]과는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정부가 낳는 왕의 자식은 왕의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출생하지 않은 [[사생아]]이므로, 왕자/왕녀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위 계승권도 받지 못했다. 다만 왕이 사생아를 친자식으로 인지하여 작위를 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해 주는 경우는 흔했다. 이러한 왕의 사생아들은 보통 서류상으로는 정부의 법적 남편의 자식으로 처리되어 [[세례성사]]를 받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생아를 처리하기 위해 정부들은 위장결혼을 한 유부녀인 경우가 많았으며, 정부의 법률상 남편(사실상 기둥서방)은 아내가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본인의 호적에 올리는 대가로 금전, 작위, 관직 등의 보상을 받았다. 정실부인/왕비 이외에도 혼인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첩]]/[[후궁]]을 둘 수 있고, [[품계]]조차 받지 못한 일개 궁녀가 낳는 nn번째 아들이나 딸조차 왕비 소생보다는 한 단계 낮을지언정 엄연한 왕자녀로서 고귀하게 대우받았으며 아들이면 경우에 따라 보위까지 이을 수 있었던 동양의 왕실과는 대조적인 특징이다.] 앤은 여자로서의 매력으로 [[헨리 8세]]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입담과 지성으로도 그를 매혹시켰다. [[신학]]에 나름 관심이 있었던 앤은 --재야 신학자였던--[* [[헨리 8세]]의 이름으로 발표한 [[신학]] 책들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처럼 헨리에게 연금을 타먹는 인문주의자나 잉글랜드의 [[주교]]들이 왕의 명의로 발표한 것들이다. 다만 유력자의 이름으로 발표하는건 원래 필자들도 선호하던 방식이고 그 당시 주장을 강화하는 도구이기도 했으며, 딱히 현대처럼 욕 먹을 일도 아닌, 흔히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헨리 8세와 신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몇 년간 알콩달콩 하던 [[헨리 8세]]는 "오랜 결혼 생활로 감정이 소원해진 데다 나이가 들어 이제 더는 자녀를 낳아줄 수 없는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헤어지고, 젊고 매력적인 앤과 결혼하여 적법한 아들을 낳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앤이 헨리를 일방적으로 들볶아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헨리 또한 간절히 앤과의 결혼을 원했으며, 결국 이후 벌어진 사태에서 가장 영향을 발휘하고 결정을 내린 사람은 헨리였다. 앤이 헨리에게 동침을 허락한 후에도 헨리는 "[[사생아]]가 아니라 적법한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며 거절하지 않았겠느냐고 설득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카를 5세의 이모였기에[* 카를 5세의 어머니 [[후아나(카스티야)|후아나]]의 여동생.] 당시 [[헨리 8세]]에게 이혼이 정치적, 법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혼, 혼인무효화[*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인무효'라는 표현을 쓰는데, 애초에 중세시절 자주 이용했기에 이혼이니 혼인무효니 하는 용어는 중요치 않다. 현대에도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혼'이라는 개념은 없다. 다만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자녀에게 [[세례성사|가톨릭 세례]]를 주는 것을 반대하거나, 결혼 전에 몰랐던 중대한 기만 사유가 있거나, 가톨릭 신앙생활을 반대하거나, 가톨릭교회의 허락(관면) 없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자와 결혼한 경우 등등 몇 가지 사유로 '혼인무효'를 할 수 있다. 이 '혼인무효'를 하지 않고 (세속 법으로) [[이혼]]한 후에 재혼하면 '혼인조당'에 걸려, 정상적으로 [[7성사|성사]]를 받으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혼인성사]] 참조.]를 감행했던 것은, 왕이 그만큼 대단히 절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가]]의 유일한 남성이었고, 그가 재위기에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하면 [[헨리 7세]]가 세운 튜더 왕가는 겨우 2대 만에 직전의, [[장미전쟁]]처럼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다시 한번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메리 1세]])를 두었지만 당시 풍속에 의하면 왕족은 왕족끼리 결혼하는 것이다. 따라서 메리 공주가 고모들처럼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나 [[프랑스 왕국|프랑스]] 같은 타국 왕족에게 시집가면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은 외국에 팔려가는 격이라고 신하들도 우려했다.[* 이 때문에 중간에 파기되었으나 [[메리 1세|메리 공주]]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조카 카를 5세와의 약혼이 체결된 적도 있었고, 왕위 계승권 덕에 각국에서 혼인 상대로 인기가 많았다.] 이처럼 이혼 문제는 드라마나 소설상의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과 [[가톨릭]] 세력 VS [[헨리 8세]]와 잉글랜드 정체성의 국교회 세력의 정치적 갈등의 대리전이었다. 역사적으로 선대 [[헨리 7세]] 시절 왕의 장자 [[아서 튜더]]와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약혼을 했고 캐서린은 [[지참금]] 20만 크라운을 챙겨서 잉글랜드에 왔다. 그러나 결혼 6개월만인 1502년 아서가 요절했고, 캐서린은 과부가 된다. 헨리 7세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아까웠기 때문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지참금 문제로 다툼을 벌였고, 시아버지와 친아버지가 다투는 동안 캐서린은 몇 년 동안 과부 신세로 잉글랜드에 버려져 있었다. 대신 타협책으로 "캐서린을 아서의 동생 헨리와 결혼시킨다"는 둥의 협상이 있었으나, 좀처럼 성사는 되지 않은 채 7년을 끌었다. 헨리 7세가 사망하자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교회법상 결혼할 수 없는 사유였으나 당시 교황 [[율리오 2세]]가 기독교 군주끼리의 결합은 대의로 인정하여 관면해 주었다.'''[* 이는 [[근친혼]]이 예사인 유럽 왕족의 다른 결혼에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법상 6촌(동양의 12촌) 이내의 친족은 원칙적으론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귀족이나 왕족들은 상속과 계승권과 외교상 이유로 자주 관면을 요구하여 근친혼이 성행했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전원 예외없이 통치 가문 출신과 결혼해야 했고, 결혼 상대로 어울리는지 이득, 신분, 격을 다 따져 결정했다. 그러다보니 선택지가 워낙 좁아져 친인척들간의 결혼이 빈번할 수 밖에 없게 것이다. 실제로 유럽 제일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왕가와 모두 친척이었고, 덕분에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 국왕들과 왕비들의 얼굴을 보면 근친혼의 부작용인 안면비대칭, 심한 주걱턱 등이 눈에 띈다.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대표적인 예시.] 결국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그녀와의 혼인을 '''무효화'''(annulment)해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했다. 이유는 "캐서린이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튜더]]와 먼저 결혼한 몸이었으므로, 이는 [[구약성경]] [[레위기]]에서 "형수를 취한 자는 자손이 끊어진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자신의 그 처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 사유에 해당했다(...) ''' 이후 캐서린은 줄줄이 낳은 자식들은 [[사산]]되거나 [[요절]]하며 외동딸 [[메리 1세]]만 남았고, 헨리보다 6세나 연상인 캐서린이 30대 중반이 되자 [[헨리 8세]]는 왕비 소생의 아들은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이혼을 시도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헨리의 형 아서와 결혼할 당시 둘 다 16세였다. 중세 [[유럽]]에선 10대 중반에도 [[임신]]과 [[출산]]이 오히려 흔한 일이었고 10대 초반도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로 봐서 6개월 간 결혼 생활을 했으면서도 처녀였다고 주장했던 건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결혼 6개월 만에 죽은 것을 보면, 결혼 기간 내내 몸이 좋지 않아 2세 계획을 회복 후로 미루고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아서와의 결혼은 시동생과의 새 결혼에서 명백한 혼인무효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행해서 아서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하여 헨리 8세와의 결혼이 적법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미 헨리와의 결혼 이전 처녀라는 공식적인 증거가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궁정에 제시되었고 헨리는 첫날밤에 "캐서린은 처녀였다"고 자주 자랑하곤 했다. 이는 애초에 헨리가 지참금을 많이 가져온 형수와 결합하려고 명분을 쌓은 성격도 있기에, 도리어 20년 후 자신을 옭아맬 불리한 증거이기도 했다. 게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캐서린은 아예 [[성경]]에 대고 "헨리 8세와 결혼할 당시에 나는 처녀였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요구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혼인무효 요청을 불허했다. 명목상으론 "전임교황 [[율리오 2세]]의 처분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론 캐서린의 조카가 당시 에스파냐([[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였던 데다가, 교황 역시 전투에서 패망하여 사실상 황제의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황제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 순종적이었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헨리 8세]]의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나만이 잉글랜드의 진정한 왕비이며, 나와 헨리 8세와의 결혼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버텼다. 캐서린은 늘 순종적이니 당연히 이혼도 순종적으로 해주겠거니 했던 단순왕 헨리는 이런 그녀의 태도에 당혹하면서도, 처음으로 대든다고 화를 냈다고(...) 7년에 걸친 긴 법적 공방과 로비 끝에, 헨리 8세는 마침내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부인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켜서 잉글랜드 판 [[종교개혁]]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출범했다. 당시 대륙의 유행하던 [[복음주의]]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앤은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내의 종교개혁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연인 관계인 헨리 8세에게 영향력을 어느정도 미친걸로 보인다. 1533년 1월, 첫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강제 추방된 상태에서 헨리 8세와 앤은 마침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앤 불린은 이미 계획적으로 아이를 가진 채 결혼했다. 그 해 [[부활절]]에 헨리 8세는 앤의 임신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결혼식에서 헨리 8세가 "천 일 안에 아들을 낳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라는 소리를 앤에게 했다는 설이 기록되었는데, 역사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헨리 8세]]는 앤에게 푹 빠져 있었고 한창 연애할 때에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그가 새 신부에게 그렇게 차가운 말을 했을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헨리는 앤이 임신한 아이가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고, 점성가들 대다수도 [[왕자]]의 탄생을 예고하여 이미 궁정서기들은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까지 작성해 놓았다. 같은 해 9월에 앤은 자신의 첫 딸 [[엘리자베스 1세]]를 [[출산]]했다. 앤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예상이 궁정에 널리 퍼져 있어서 모두들 실망했으나, 정작 [[헨리 8세]]는 "왕비가 [[공주]]를 낳았으니 곧 [[왕자]]도 낳을 것이다."며 무척 기뻐했고, 딸을 낳아 실망하고 있던 앤에게 "곧 아들들도 태어날 거요."라고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 앤은 끝내 아들을 출산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외모는 물론 성격도 가장 빼닮은 자녀로 평가된다.] 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에 적힌 "[[왕자]]prince"에는 s 한 쌍을 뒤늦게 추가해 "[[공주]]princess"라고 표시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를 출산한 후로 앤의 운명은 빠르게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자그마치 7~8년간이나 열렬히 사랑한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고작 2년 9개월여 만에 파국을 맞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